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 법정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재판
서론: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군가를 ‘심판’한다
뉴스를 보다가, 누군가의 실수담을 들으면서, 혹은 댓글창을 스르르 내려보는 동안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마음속에서 재판을 열어 버립니다. “저 사람은 잘못했어.”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누가 맞고 틀렸는지, 무엇이 정의고 부당한지 우리는 스스로 판결을 내리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심판』은 바로 이런 우리 안의 재판관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단순한 법정 스릴러를 넘어, 법과 도덕, 인간의 양심과 본성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당신이라면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입니다.

작품 개요: 살인과 침묵, 그리고 한 형사의 결심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내를 잃은 형사 마이클이 있습니다. 그는 끔찍한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남자, 알베르트를 체포하지만 사건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범인은 죄를 인정하면서도 동기를 끝까지 말하지 않는 인물. 그 침묵은 마이클에게 두 번째 폭력처럼 느껴집니다.
법적 절차는 진행되지만, 마이클의 마음속 분노와 상실감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법이 하지 못하는 정의를 내가 직접 실행한다면, 그건 정의일까, 아니면 또 다른 죄일까?”
이 물음 앞에서 마이클은 피해자와 수사관, 그리고 잠재적 가해자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독자를 조용히 재판대에 세워 놓습니다.
법과 도덕 사이: 정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심판』은 법과 도덕이 어긋나는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법은 증거와 절차에 따라 판결을 내리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결과가 “정의”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이클은 바로 그 간극에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법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법 밖에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이 과연 정당한지 끝없이 자문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정의의 기준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인공지능이 재판 자료를 분석하거나, 판결의 참고 지표를 제시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날, “AI가 내린 판결은 감정이 없어 더 공정하다”는 이유로 기계가 인간의 양심을 대신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심판』은 이런 질문들을 소설의 형태로 압축해 독자에게 던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윤리적 선택과 인간의 본성: 피해자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알베르트의 침묵은 단순히 “말 안 하는 범인”이라는 설정이 아닙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악, 설명되지 않는 어둠의 얼굴을 상징하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왜 그랬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편 마이클은 분명 피해자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복수를 결심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비판하던 “가해자”의 자리와도 가까워집니다. 그 사이에서 마이클이 겪는 갈등은 곧 우리의 갈등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어느 순간 이런 상상을 하게 됩니다. “만약 내가 마이클이라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그 선택의 순간, 우리는 분노와 양심, 정의와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베르베르는 이 흔들림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면으로 향하는 재판 – 진짜 심판관은 누구인가
소설이 흥미로운 지점은, 처음에는 외부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사와 재판처럼 보이던 이야기가 점점 “마이클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심판”으로 옮겨간다는 점입니다.
그는 알베르트를 향한 심판을 준비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재판대에 세웁니다. “나는 정말 정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동하는가, 아니면 내 상처와 분노를 합리화하고 있을 뿐인가?”
이때 『심판』은 단순한 범죄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자기 성찰에 대한 철학 소설로 변모합니다. 작가는 완벽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짜 심판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 줄 뿐입니다.
현대 사회와의 연결: 여론 재판, AI 판결, 그리고 우리의 작은 심판들
『심판』이 흥미로운 이유는 소설 속 질문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과도 밀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하고, 댓글과 SNS를 통해 순식간에 누군가를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단정짓기도 합니다.
충분한 정보 없이 내리는 판단, 편집된 화면 몇 장면만 보고 내리는 결론, 그리고 그 결과로 누군가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흔드는 말들. 이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심판’입니다.
한편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점점 더 많은 결정을 대신하게 되는 시대에 우리는 공정함을 기술에 맡기고 안심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판결”은 숫자와 알고리즘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인간의 가치관과 윤리적 선택이 개입됩니다.
베르베르의 『심판』은 이런 세계에서 우리가 내리는 크고 작은 판단들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를 너무 쉽게 심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습니다.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다음과 같은 독자라면 『심판』에서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사유의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법과 정의, 도덕과 양심에 관심이 있지만, 딱딱한 이론서보다는 소설을 선호하는 분
- 범죄·법정 스릴러를 좋아하면서도, 인물의 심리와 철학적 질문에 끌리는 독자
- 여론 재판, 댓글 문화, 인공지능 판결 등에 불편함을 느껴 본 사람
- “내가 내리는 판단은 과연 얼마나 공정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은 이들
『심판』은 사건의 트릭만으로 독자를 몰아붙이는 소설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나면, 언젠가 다시 꺼내 보고 싶어지는 장면들이 마음 어딘가에 남습니다.
마무리: 완벽한 정의는 없지만, 성찰하는 인간은 구원 가능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심판』을 통해 완벽한 정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완전히 떳떳해지기 어려운 인간의 조건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우리를 절망으로 밀어 넣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한 가지 가능성을 남겨 둡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순간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
진정한 심판은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판결문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심판』은 그 질문을 우리 손에 쥐어 주고, 각자가 자기 삶 속에서 그 답을 찾아가 보라고 말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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