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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왕 되기 프로젝트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인간성과 도덕적 용기의 이야기

by 실리뽀 2025. 10. 14.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용기

1. 너무 얇아서,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책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가장 놀랐던 건 두께였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기에, 저는 두꺼운 장편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클레어 키건『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짧고도 얇은 중편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몇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한동안 일상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불의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을,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의 일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2. 1985년 아일랜드, 겨울을 견디는 한 가장의 하루

배경은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입니다. 석탄을 배달하며 다섯 딸과 아내를 먹여 살리는 빌 퍼런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가장입니다. 그는 장부를 맞추고, 빚을 조절하며, 크리스마스를 앞둔 마을 사람들의 난방을 걱정합니다.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이념의 공간이 아니라, 하루 벌어 하루를 난방하는 구체적인 현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은 석탄 납품을 위해 찾아간 수도원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낍니다. 닫힌 문, 숨겨진 방, 어딘가 불편한 침묵. 그 안에는 어린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거의 감금에 가까운 환경에서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독자가 자연스럽게 “마그달렌 세탁소”라는 아일랜드의 어두운 역사를 떠올리게 만들죠.

빌은 이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고, 마을 주민들과 경제적으로 얽혀 있고, 종교 공동체의 권위 앞에서 감히 나서기 어려운 평범한 시민이니까요.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3. 영웅이 아닌 사람의 용기 – 빌 퍼런이라는 인물

빌 퍼런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가 영웅처럼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망설이고, 계산하고,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가족에게 어떤 위험을 가져올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우리였다면 똑같이 했을 법한 생각들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빌은 “못 본 척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을 통째로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눈앞의 한 사람에게만큼은 등을 돌리지 않으려 합니다. 이때 그의 선택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작으며,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행동들로 나타납니다.

클레어 키건은 빌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는 빚과 피로, 육아와 생계가 얽혀 있고, 판단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도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독자는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 공감이야말로, 작품이 독자에게 윤리적 질문을 전달하는 힘입니다.

4. 침묵의 공모와 작은 선택 –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은 이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제목 그대로 “사소한 것들”입니다. 수도원의 문을 잠그는 사람만이 폭력의 가해자가 아닙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 도와달라는 눈빛을 외면하는 사람들, “원래 그런 곳이야”라고 애써 합리화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구조의 일부로 편입됩니다.

작가는 그 침묵을 거대한 악의 성명서가 아니라, “하루를 평온하게 넘기고 싶은 평범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립니다. 그래서 더 섬뜩합니다. 악은 거창한 얼굴로 등장하지 않고, “오늘은 그냥 모른 척하자”라는 작은 타협 속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빌이 내리는 결정은 세상을 뒤집을 만큼 큰 행동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작은 연대와 보호는 최소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부당한 상황을 봤을 때,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5. 한국 독자에게 다가오는 아일랜드의 그림자

마그달렌 세탁소는 한때 아일랜드 가톨릭 사회에서 “타락한 여성들을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운영되던 시설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강제 노동과 인권 침해가 벌어졌고, 그 사실이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여러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장애인·아동·노인을 수용한 시설에서 드러나는 학대 사건들, 조직 내에서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폭력과 비리, “괜히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모른 척하는 것이 안전해 보이는 분위기까지. 우리의 사회에도 여전히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세탁소’들이 남아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과거 아일랜드의 기록을 넘어, 현재 한국을 비추는 거울처럼 읽힙니다. 빌의 행동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완전히 침묵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작은 다짐을 건넵니다.

6. 겨울의 공기처럼 절제된 문장 – 클레어 키건의 문체

클레어 키건의 문장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습니다. 읽다 보면 겨울 공기처럼 차갑고 맑은 문장이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감정은 과장되지 않고, 사건은 낭만적으로 포장되지 않습니다.

빌이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 석탄 냄새가 배어 있는 작업장,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 이 모든 풍경이 짧은 문장들 속에 고요히 놓여 있습니다. 독자는 설명을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은데도, 어느새 그 마을의 차가운 골목을 함께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절제가, 작품의 윤리적 긴장을 더 날카롭게 만듭니다. 선정적인 묘사 대신, 독자의 상상력과 양심을 호출하는 방식. 그 덕분에 이 책은 “읽는 동안 울컥하는 작품”이기보다, “다 읽고 난 뒤 서서히 속을 흔드는 작품”으로 남습니다.

7. 이런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

  • 두껍지 않지만 오래 남는 세계문학을 찾는 독자
  • 사회 뉴스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하고 싶은 사람
  • “착하게 사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30~50대
  •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클레어 키건 문학 세계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장대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에 대해 묻는 책입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구호보다, “오늘 내가 외면하지 않을 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 그 조용한 힘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8. 마무리 – 세상을 조금 덜 냉혹하게 만드는 일

우리는 모두 빌 퍼런과 비슷한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한 장면을 목격하고도 모른 척 지나친 적, 말하면 귀찮아질 것 같아 침묵한 적, 선을 넘는 농담과 행동을 보고도 “그냥 저 사람 원래 저래”라고 넘긴 적.

클레어 키건은 말합니다. 세상을 완벽하게 정의롭게 만들 수는 없지만, 조금 덜 잔인한 곳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의 몫이라고.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들 속에 있다고요.

이 얇은 책 한 권이 마음속에 남기는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조금 더 용감한 내일을 향한 작고 단단한 결심입니다. 오늘 당신이 마주하게 될 “사소해 보이는 장면”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이 책이 조용히 물어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