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달려라 메로스』 – 신뢰가 무너진 시대에 다시 읽는 약속의 의미
학교 교과서에서 한 번쯤 읽어본 우정 이야기.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펼쳐보면, 메로스의 달리기는 단순한 감동 서사가 아니라 “신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인간의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는, 믿음이 가장 사치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고전입니다.

1. 왜 지금, 다시 『달려라 메로스』인가
다자이 오사무는 흔히 『인간 실격』의 작가로 기억됩니다. 인간의 나약함, 자기혐오, 절망을 집요하게 파헤친 작가죠. 그런 그가 쓴 『달려라 메로스』는 어쩌면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희망과 신뢰, 우정 같은 단어를 숨기지 않고 내세웁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다자이 문학 안에서 일종의 역설처럼 빛납니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작가가, 누구보다 강한 신념을 지닌 인물 메로스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질문이 됩니다. “정말로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가벼운 약속도 지키기 어려운 오늘의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2. 목숨보다 무거운 약속 – 최소한의 줄거리
정의로운 청년 메로스는 폭군 디오니스의 폭정에 분노해 그를 죽이려다 붙잡힙니다. 사형을 앞둔 그는 마지막으로 여동생의 결혼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대신 가장 소중한 친구 셀리누스를 인질로 남겨둡니다. 기한은 사흘. 돌아오지 않으면 친구가 대신 죽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메로스는 정말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약속의 무게를 알고 있습니다. 결혼식을 치르고 다시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자연의 방해, 우연한 사고, 절망적인 상황을 연달아 맞닥뜨립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거의 부서진 몸으로 해가 지기 직전 성문에 쓰러지듯 도착합니다.
중요한 건 “메로스가 결국 시간을 맞췄다”는 결말이 아닙니다. 더 의미 있는 순간은,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돌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그 과정입니다. 신뢰란 바로 그 발버둥 속에서 증명됩니다.
3. 인물로 읽는 『달려라 메로스』 – 세 가지 인간의 얼굴
이 작품을 조금 더 깊게 읽고 싶다면, 메로스·셀리누스·디오니스를 각각 하나의 상징으로 바라보면 좋습니다.
3-1. 메로스 – 믿기로 선택한 사람
메로스는 처음부터 완벽한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중간에 여러 번 흔들리고, “정말로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려워하며 좌절도 맛봅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달리는 이유는, 친구를 믿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속을 어기지 않는 나 자신을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메로스의 달리기는, 타인을 향한 믿음이자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붙잡기 위한 몸부림으로 읽힙니다.
3-2. 셀리누스 –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
셀리누스는 신뢰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는 메로스를 대신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질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도 메로스는 돌아오지 않고, 주변 사람들은 “이미 도망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셀리누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를 믿으려 애씁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상대의 완벽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기다려주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3-3. 디오니스 –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
폭군 디오니스는 겉으로는 권력을 쥐고 있지만, 누구도 믿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의 약점을 너무 잘 알기에, 세상 모두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메로스와 셀리누스를 시험합니다. “인간은 결국 배신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확신을 증명하고 싶어서요.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서로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때 디오니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확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마주합니다. 폭군의 변화는, 신뢰가 얼마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바꾸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4. 절망의 작가가 쓴 “신뢰의 이야기”라는 역설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달려라 메로스』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내면을 바탕으로 “인간은 결국 실패하고 무너지는 존재”라는 감각을 끊임없이 써 내려갔습니다. 그런 작가가 굳이 “인간은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번 남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작품은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러운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내보는 희망에 더 가깝습니다. 신뢰는 순진함이 아니라, 절망을 알고도 다시 선택하는 용기라는 메시지가 작품 전체를 관통합니다.
5. 개인주의 시대의 메로스들 – 신뢰의 현대적 의미
오늘날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언제든 끊길 수 있는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읽지 않은 메시지, 답장 없는 채팅, 언제든 탈퇴할 수 있는 모임. 관계가 가벼워질수록, 책임과 약속의 무게도 함께 줄어듭니다.
이런 시대에 『달려라 메로스』는 다소 과장된 비유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가? 현실에서 그런 상황은 거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질문은 훨씬 더 일상적입니다.
- 나는 누군가와 한 약속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가
- 상대가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얼마나 쉽게 의심으로 돌아서는가
- 신뢰를 저버렸을 때, 그 대가를 충분히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메로스의 달리기는 결국 이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어떤 관계를 선택하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신뢰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작은 약속을 지키는 반복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6. 이 책이 필요한 순간 – 이런 독자에게 추천합니다
-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자꾸 흔들릴 때
- 어릴 때 읽었던 『달려라 메로스』를 “어른의 시선”으로 다시 만나보고 싶을 때
- 다자이 오사무를 절망의 작가가 아닌, 다른 얼굴로 기억하고 싶은 독자
- 우정·약속·신뢰 같은 오래된 단어를, 지금의 언어로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
짧은 분량이지만, 천천히 읽으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입니다. 한 번은 줄거리를 따라가며 읽고, 두 번째는 “각 인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떠올리며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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