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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왕 되기 프로젝트

에쿠니 가오리 『낙하하는 저녁』 – 이해되지 않는 마음과 함께 사는 법

by 실리뽀 2025. 11. 13.

에쿠니 가오리 『낙하하는 저녁』 – 이해되지 않는 마음과 함께 사는 법

어떤 감정은 끝까지 말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가까운 것 같다가도 갑자기 멀어지는 마음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낙하하는 저녁』은 바로 그런 이상하고도 진짜인 감정들을 조용히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1. 에쿠니 가오리, 감정의 결을 따라가는 작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순간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감정을 포착해 내는 데 탁월한 작가입니다.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 대신, 일상 대화의 어색한 침묵, 한숨과 웃음 사이의 미묘한 표정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의 움직임을 천천히 길어 올립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도쿄 타워』에서 이미 보여줬듯, 그녀의 세계는 늘 “보통 사람들의 사랑과 관계”를 다룹니다. 『낙하하는 저녁』은 그중에서도 사랑의 후일담, 상실 이후의 감정, 이름 붙일 수 없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입니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른 로맨스와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야기의 무대 – 이별 이후, 저녁빛이 내려앉은 집

주인공 가호는 연인과의 관계가 끝난 뒤,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도시의 리듬에서 물러나 낯선 동네의 집으로 옮겨 갑니다. 머릿속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그저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싶어서 선택한 장소에 이미 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조금은 현실에서 동떨어져 보이는 여성 도루코입니다.

가호와 도루코는 처음부터 친밀한 사이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밀어내지도 못합니다. 같은 집에 머물며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둘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가 생겨납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공기와 온도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눈에 띄는 사건은 거의 없고, 저녁의 빛과 날씨, 작은 대화와 움직임이 전체 서사를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낙하하는 저녁』을 읽는 경험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어떤 분위기 속에 함께 머무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3. 가호와 도루코 –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

1) 말로 정의되지 않는 관계의 얼굴

가호와 도루코의 관계는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낯설고,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기대면서도 완전히 기대지 않고, 때로는 서로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듯하면서도 어떤 거리 이상으로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관계를 종종 마주합니다. 굳이 이름 붙이면 애매해지고, 설명하려고 하면 더 이상해지는 사이. 『낙하하는 저녁』은 그 “애매함”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 관계를 통해 “모든 관계가 꼭 명확하게 정의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상실 이후에 찾아온 낯선 친밀감

가호는 사랑을 잃은 자리에서 도루코를 만납니다. 그래서인지 둘 사이의 친밀함에는 늘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서로에게 기대면서도, 언젠가는 이 시간이 끝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하죠.

이들의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너무 단순한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이별은 사랑의 끝이지만, 감정의 끝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도 마음은 계속 낙하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그 복잡한 움직임을 급하게 정리하지 않고, 저녁 하늘처럼 길게 늘어뜨린 채 지켜봅니다.

4. 현실과 환상의 경계 – 마음의 풍경을 닮은 서사 방식

『낙하하는 저녁』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이 장면이 실제일까, 아니면 마음속 풍경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도루코라는 인물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꿈결 같은 인상으로 남습니다. 가호의 내면이 투영된 존재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고, 집이라는 공간에 깃든 일종의 정령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일부러 이 경계를 흐려 놓습니다. 현실과 환상이 정확히 나뉘지 않는 서사 방식은 “마음의 세계는 언제나 복수의 진실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메시지처럼 읽힙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겪은 일을 마음속에서 여러 번 다시 해석하고, 같은 장면을 다른 감정으로 기억하기도 하니까요.

이런 모호함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내 감정이 잘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느낌을 줍니다. 딱 떨어지는 이유와 결론이 없는 감정도, 그 자체로 하나의 진짜 경험이라는 것을 소설이 대신 말해 줍니다.

5. 『낙하하는 저녁』이 건네는 조용한 통찰

  • 사랑의 형태보다 진심이 먼저다 – 관계를 설명하는 이름보다, 그 안에서 오가는 감정의 밀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 상실은 새로운 감정의 시작점 – 이별 이후의 공허함 속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마음이 다시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마음의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용기 – 이해되지 않는 감정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관계도 삶의 일부로 두는 태도를 제안합니다.

이 책은 어떤 정답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감정이 복잡한 것은, 그것이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을 너무 빨리 해석하고 판단하려 하는 사람에게는, 이 한 권이 속도를 늦추는 브레이크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6. 이런 분께, 이 저녁 소설을 권합니다

  • 관계의 이름보다, 관계 안에서의 공기와 분위기에 더 민감한 분
  • 이별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막막했던 적이 있는 분
  • 사건보다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
  •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살짝 흐려지는 감성소설을 찾는 분

『낙하하는 저녁』은 큰 결심을 한 날보다, 그냥 마음이 조금 무겁고 설명하기 어려운 날에 더 잘 어울리는 책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창밖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시간을 함께 바라보며 읽기 좋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7. 마무리 – 낙하하는 저녁, 천천히 가라앉는 마음을 바라보는 시간

『낙하하는 저녁』은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응시하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상실 이후에도 마음이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 줍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 설명되지 않는 끌림, 완벽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밉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그 복잡한 마음을 굳이 하나의 결론으로 단정 짓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조차, 그대로 두면 언젠가 당신만의 언어가 된다.” 『낙하하는 저녁』은 그 언어를 찾기 전,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저녁빛 같은 책입니다. 마음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날, 그 낯섦을 안고 이 소설을 펼쳐 보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