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리뷰 – 지친 어른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한 장면
서론: 어른이 되어 처음 만난 그림책
어느 날,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별일은 없었는데 유독 마음이 무겁고, 누군가가 “괜찮아”라고 말해줬으면 싶은 날. 저는 그런 날에 찻잔 옆에 이 책,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표지만 보면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처럼 보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금세 알게 됩니다. 이 책은 사실 어른을 위한 마음 사용 설명서에 가깝다는 것을요. 소년과 동물 친구들이 나누는 짧은 대화 속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질문과 위로가 조용히 숨어 있습니다.
1. 책의 형식 – 그림과 손글씨로 쓰인 철학 에세이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한 줄짜리 글과 한 장의 그림이 나란히 놓여 있는 구조의 책입니다. 긴 설명이나 스토리 전개보다, “한 장면, 한 문장”이 주는 감정에 집중하게 만드는 형식이죠.
작가이자 화가인 찰리 맥커시(Charlie Mackesy)는 글과 그림을 모두 직접 그렸습니다. 수묵화처럼 번지는 잉크 선, 연필 느낌이 살아 있는 선, 거기에 인쇄된 폰트가 아니라 작가의 실제 손글씨가 더해져 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치 누군가의 노트를 몰래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냥 읽는 책’이라기보다,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책에 가깝습니다. 서둘러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이 멈추는 페이지에서 한동안 머무르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이 책을 읽는 올바른 방식입니다.
2. 소년과 세 친구 – 서로의 약함을 끌어안는 여정
이야기는 한 소년이 길을 걷다 두더지, 여우, 말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특별한 목표가 있는 여행이라기보다는, “함께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여정입니다.
각자의 캐릭터도 매력적입니다. 케이크를 사랑하고 솔직해서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두더지, 상처가 깊어 말수가 적지만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여우, 그리고 인생의 오래된 지혜를 품은 말. 이들은 모두 완벽하지 않고, 조금씩 부서진 존재들입니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이런 대화입니다.
“네가 가장 용감했던 순간은 언제야?”
“도움을 요청했을 때.”
보통 우리는 용기를 “혼자 버티는 힘”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정반대의 답을 내놓습니다. “약함을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일 수 있다고. 이 한 문장을 읽는 순간, 그동안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도 함께 떠오릅니다.
3. 그림이 먼저 건네는 위로 – 여백의 힘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건 사실 문장이 아니라 “여백”이었습니다. 그림은 많은 것을 그리지 않습니다. 소년과 동물 한두 마리, horizon처럼 그어진 낮은 선, 그 위에 얹힌 하늘 같은 빈 공간.
그런데 그 비어 있는 여백이, 오히려 우리 마음의 공기를 닮아 있습니다. 바쁘게 채워 넣는 대신, “잠깐 멈춰서 숨 좀 쉬라”고 말해주는 것 같달까요.
요즘처럼 눈과 머리에 정보가 끊임없이 밀려드는 시대에 이 책의 흑백 그림은 묵직한 대비를 만들어 냅니다. 화려한 색감은 거의 없지만, 잉크의 번짐과 붓터치 하나하나에서 “대신 울어주는 선” 같은 느낌이 전해집니다. 위로라는 건 거창한 말보다, 때로는 이렇게 조용한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이 책이 건네는 세 가지 질문
1) 나는 나에게 얼마나 친절한가
책 곳곳에는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라”는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단순한 자기계발 슬로건이 아니라, “너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만큼 자신에게도 다정하게 말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수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내가 했을 때는 “왜 또 이래, 정말 한심해”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 책은 그 언어를 바꾸어 보자고 제안합니다. 소년과 친구들의 대화는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하니까요.
2) 함께 있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소년과 세 친구가 나누는 말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두려워도 괜찮아, 우리는 함께 있으니까.”
이 책이 말하는 우정이나 사랑은 거창한 희생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저 옆에서 같이 걸어 주는 것, 필요할 때 한마디를 건네 줄 수 있는 거리. “함께 있음” 자체가 위로가 되는 관계를 가만히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 보면 내 삶의 소년·두더지·여우·말 같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항상 연락하지는 않지만,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얼굴들 말이죠.
3) 작은 기쁨을 허락하는가
많은 분이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 두더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케이크를 사랑해도 괜찮아.”
얼핏 보면 귀여운 농담 같지만, 사실은 꽤 중요한 선언입니다. “이 정도면 됐지, 더 바라면 안 돼”, “이렇게 편해져도 되는 걸까?”라며 소소한 행복조차 스스로 금지해 왔던 마음에게 “괜찮다, 너도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말이니까요.
이 책이 말하는 행복은 대단한 성공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디저트 한 조각, 좋은 사람과 걷는 산책길, 잠들기 전 몇 페이지의 책. 그런 사소한 기쁨이야말로 우리가 버티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라는 것을 소년과 두더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일깨워 줍니다.
5. 다른 힐링 에세이와 무엇이 다른가
요즘은 “위로의 문장집”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 그 많은 책 사이에서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한 명언 모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억지로 힘내라고 다그치는 문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행복해져요”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나도 사실 두렵다”, “도움을 요청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는 고백을 솔직하게 꺼내놓습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도 자신 안의 약함을 조금은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많은 힐링 에세이가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 책은 그보다 한 발 앞서 “지금 괜찮지 않은 너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책에 가깝습니다. 위로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에 남는 울림도 훨씬 깊게 느껴집니다.
6. 이런 분께 특히 추천하고 싶어요
- 하루를 끝낼 때마다 “오늘도 제대로 못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분
- 긴 글은 잘 안 읽히는데, 짧은 문장과 그림으로 위로받고 싶은 분
-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성향이라고 느끼는 분
- 선물용으로 무난하면서도 오래 남는 책을 찾는 분
- 아이와 함께 보기 좋은 그림책이지만, 어른인 내가 먼저 위로받고 싶은 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기보다, 침대 머리맡이나 책상 위에 두고 가끔씩 한두 장면씩 꺼내 보는 방식이 잘 어울립니다. 어떤 날은 두 페이지면 충분하고, 어떤 날은 열 장을 넘겨도 더 읽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마무리 – 오늘의 끝에서, 소년과 친구들이 건네는 한마디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거창한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책을 덮는 그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을 남깁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책에서 찾는 것은 복잡한 삶의 해답이 아니라, “그래도 내일 한 번 더 살아볼 수 있겠다”는 작은 용기일지도 모릅니다.
지친 하루의 끝, 따뜻한 음료 한 잔 옆에 이 책을 펼쳐 보세요. 소년과 두더지, 여우와 말이 나누는 조용한 대화 속에서 오늘의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믿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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